2015년 05월 통권 제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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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현대 영미 아동문학 살펴보기]
조안 에이킨1 (1924~2004)

유영종 | 2015년 05월

1924년 영국에서 태어난 조안 에이킨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시인 콘래드 에이킨의 딸입니다. 부모님은 에이킨이 5살 때 이혼했고, 에이킨은 곧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양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양아버지는 유명한 영국 소설가 마틴 암스트롱이였습니다. 에이킨은 12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공부를 했는데, 어머니는 에이킨에게 매일매일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가족 사이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좋은 이야기의 구성 요소, 소설의 기법 등 문학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에이킨은 아주 일찍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창작 공책을 만들어 자신의 이야기들을 정리했습니다. 후에 에이킨뿐만이 아니라 에이킨의 오빠와 언니도 작가가 되었습니다.

에이킨이 첫 작품을 발표하게 된 데에는 양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양아버지는 한때 영국 공영방송(BBC)의 한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그 작품들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것을 본 에이킨도 양아버지의 작품을 흉내 내며 풍자한 작품 하나를 방송국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송국에서 계약을 맺자고 연락을 한 것입니다. 에이킨이 겨우 16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평생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아 살아갈 것 같던 에이킨의 삶에도 굴곡이 많았습니다. 결혼, 두 아이의 출산, 남편과의 이른 사별, 집까지 잃게 된 파산, 그리고 그 후 계속된 가난 때문에 에이킨은 한동안 작품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도서관 사서, 잡지 편집자, 광고문 작성자로 일을 하며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이킨은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움직일 때나 감자 껍질을 벗기다 쉴 때 같은 자투리 시간에 계속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쓴 『윌러비 언덕의 늑대들』(1962)이 성공을 거두어 예전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집을 사서 정착한 후에야 겨우 전업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껏 작품을 쓸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된 에이킨은 그 후 매년 두세 권의 작품을 펴내며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4년 79세로 세상을 떠날 때에는 희곡, 시, 에세이,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소설, 단편 소설 등 100권도 넘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여러 장르, 그리고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를 대상으로 작품을 썼지만 에이킨은 무엇보다 어린이문학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작품도 그렇고, 대표작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작품들도 어린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에이킨의 특별한 재능은 단편 소설에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에이킨의 단편 소설들은 독특하면서도 유머가 넘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영국 공영방송은 에이킨에게 어린이를 대상으로 책을 읽어 주는 프로그램에 단편 소설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런 요청에 따라 쓴 작품이 『계단 먹는 까마귀 모티머』(1972)입니다. 『계단 먹는 까마귀 모티머』는 택시 운전사 존스 씨가 길거리에서 발견한 다친 까마귀 한 마리와 존스 씨의 어린 딸 아라벨 사이의 우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9세기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까마귀」란 시에서 착상한 모티머는 포의 시에서처럼 “안 해!(Nevermore)”라는 한 마디 말밖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라벨은 모티머가 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분별력 있고 합리적인 아라벨과 말썽꾸러기 모티머는 그런 면에서 한 아이의 양면처럼 보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분별력 있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며 수시로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어른 말을 그대로 따르다보면 매일매일이 답답하고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이킨은 아라벨과 모티머의 엉뚱한 모험을 통해 아이들이 평범한 일상의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는 상상력과 그 힘을 보여 줍니다.

에이킨은 상상력을 맘대로 발휘할 수 있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단편 소설이 시와 가장 비슷한 장르라고 말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는 작가는 반미치광이로 보일 정도로 거침없는 상상력을 가진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에이킨은 어린이문학 작품들이 독자들의 마음과 상상력을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세상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 엄청나게 멋지고, 신비하고, 이상하고, 헷갈리고,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일들로 가득 찬 곳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이킨의 단편 소설들은 거의 모두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 마법 세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빗방울 목걸이』(1968)와 『시리얼 가든』(2008)은 에이킨 단편 소설의 이런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빗방울 목걸이』에는 8편의 짧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마치 요정 이야기처럼 한밤중에 책 속에서 펭귄, 물개 같은 동물과 인어, 꼬마 요정들이 튀어나오고, 강아지와 고양이가 이야기를 하고, 북풍이 가져다 준 빗방울 목걸이가 비를 내리거나 그치게도 해 줍니다. 에이킨은 이 작품들에서 환상적인 사건들을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시리얼 가든』에는 에이킨이 16살 때 쓴 첫 작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 년에 걸쳐 아미티지 가족을 주인공으로 해 쓴 이야기 25편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시리얼 가든』은 아미티지 부인이 신혼여행에서 빌었던 소원에 따라 특별하면서도 재밌는 사건이 일어나는 월요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빗방울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유니콘이 찾아온다든지, 시리얼 상자에 있는 종이 정원이 진짜 정원으로 변한다든지, 마녀들과 이웃이 된다든지 하는 마법 같은 일들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일어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에이킨은 세상이 환상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에이킨의 단편 소설은 앞 시대에 활동했던 영국 동화작가 이디스 네스빗(1858~1924)의 작품들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일상과 환상을 딱히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무리 떠들썩한 소동과 말썽도 결국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확신을 준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에이킨의 단편 소설에는 늘 믿기 힘든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썩한 소동과 말썽도 끝에 가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에이킨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사용해 마녀와 싸우기도 하고 일상의 지루함을 이겨내기도 하며 자기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갑니다. 에이킨은 이렇듯 모든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독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에이킨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거침없는 상상력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판타지 소설은 에이킨이 단편 소설 만큼 좋아했던 장르입니다. 특히, 『윌러비 언덕의 늑대들』 시리즈는 에이킨이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총 13권의 소설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늑대 연대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에이킨은 이 연대기에서 영국 역사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시대를 만들어 냅니다. 이 시대는 1830년대 영국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의 공간입니다. 20세기 말에 완성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저 터널을 통해 대륙의 늑대들이 영국을 점점 침범해 옵니다. 그리고 영국을 다스리는 왕도 당시의 실제 왕과 다른 가문의 인물입니다. 그래서 에이킨은 이 작품들을 ‘다른 역사’ 판타지라고 불렀습니다. 에이킨은 이런 가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찰스 디킨스 소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에이킨이 ‘다른 역사’에 관심을 보인 것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에이킨은 어린이 독자들이 과거에 관심을 갖기 바랐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질문을 던질 수 있게 인상 깊은 등장인물들과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에이킨이 과거를 강조하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이킨은 자기 가족과 자기 사회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자란 아이들, 텔레비전과 컴퓨터에만 익숙해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은 중요한 문제에 맞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충분히 갖지 못할 것이라 걱정합니다. 역사란 우리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역사’ 판타지는 독자들에게 자기의 세상에 대해 질문하게 만듭니다. 에이킨은 이런 판타지를 통해 독자들이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과거로부터 배운 지식을 토대로 미래에 대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우려 했습니다.

‘늑대 연대기’ 13편을 연결시켜주는 주인공은 사이먼이라는 소년과 디도 트위트라는 소녀입니다. 독자들은 사이먼보다 디도를 이 연대기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로 생각합니다. 디도가 모범 소년인 사이먼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대기의 두 번째 작품부터 등장하는 디도는 개성 있고 강인한 소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 물정에도 밝은 디도는 잇따라 맞부딪치는 어려운 상황에 늘 침착하고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에이킨은 디도가 사이먼을 구하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암시를 하며 두 번째 작품을 끝냈습니다. 하지만 디도에게 푹 빠진 독자들의 요청과 이야기 속에서 그려진 디도의 강인한 생명력을 고려해 다음 작품에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디도는 ‘늑대 연대기’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며 시리즈 전체를 엮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에이킨이 만들어 낸 인물 중 최고로 꼽히는 디도가 나오는 작품이 하나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1999년 영국 왕실은 에이킨이 영국 어린이문학 발전에 공헌한 것을 인정해 기사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루이스 캐롤 상, 가디언 상, 에드가 앨런 포 상을 포함해 많은 문학상을 받은 에이킨은 현대 영국 어린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영미 어린이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에이킨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닙니다. 아라벨과 모티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도 13편 중 6편만 번역되어 있고, 아미티지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얼 가든』은 『아미티지 가족의 지루하지 않은 월요일』이란 제목으로 25편 중 6편만 번역되었습니다. ‘늑대 연대기’도 13편 중 첫 작품인 『윌러비 언덕의 늑대들』 한 편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실과 상상을 뒤섞는 거침없는 상상력을 보여 주는 이 작품들은 에이킨이 루이스 캐롤, 이디스 네스빗 같은 작가들의 뒤를 이어 영국 아동 판타지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켜 나간 작가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 줍니다.

1 Joan은 ‘존’ 혹은 ‘조운’이라고 발음합니다. ‘조안’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우리말로 잘못 번역된 후 그대로 쓰이게 되었지만 이 작가의 이름은 존 에이킨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옳습니다.
유영종 | 인하대학교 영문과 교수입니다. 영미 아동문학과 미국 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디고잉』에 ‘시, 말의 사원에서 즐겁게 소통하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기의 야구노트』 『불새처럼 일어나』 『크라신스키 광장의 고양이들』 『아미티지 가족의 지루하지 않은 월요일』 등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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